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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유죄이지만 대통령직 보호 위해 석방한다”

‘성추문 입막음용 돈’ 사건, 한국 대법원과 달랐던 미국 법원의 단계적 판단
등록 2025-05-08 22:27 수정 2025-05-13 17:57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1월20일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취임식을 마친 뒤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1월20일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취임식을 마친 뒤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사법 쿠데타’ 논란을 부른 조희대 대법원의 기이한 판결에 제동이 걸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사건의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재판장 이재권)가 이 사건 재판 기일을 2025년 5월15일에서 대통령 선거 뒤인 6월18일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유력한 대선 후보의 피선거권을 박탈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린 대법원과는 상반된 태도다.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2024년 11월 대선을 전후로 미국에서도 법원이 비슷한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성추문 입막음용 돈’ 사건 판결이다. 이 후보 사건과 마찬가지로 핵심은 ‘유권자의 선택’으로 모아진다.

배심원단 만장일치 ‘유죄’ 평결

뉴욕주 맨해튼 형사법원(재판장 후안 머천)이 다룬 트럼프 대통령 사건은 2016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세 가지 불법 행위가 뼈대다. 첫째,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 성관계를 한 ‘성인영화’ 배우 스토미 대니얼스의 입을 막기 위해 13만달러를 지급했다는 혐의다. 둘째, 트럼프 대통령이 장기간 내연관계였던 ‘성인잡지’ 모델 겸 배우 캐런 맥두걸의 입을 막기 위해 15만달러를 지급했다는 혐의다. 셋째,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 가사도우미와 외도해 자녀까지 낳았다는 내용을 공개하겠다고 한 트럼프타워 경비원 출신 디노 사주딘을 만류하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 쪽이 3만달러를 지급했다는 혐의다. 사주딘의 협박 내용은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졌다. 검찰 쪽은 트럼프 대통령 쪽이 대니얼스 등에게 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 불법자금을 조성했고, 이 과정에서 모두 34건의 허위문서를 작성했다고 고발했다.

2023년 3월30일 맨해튼 형사법원 대배심이 트럼프 대통령 사건의 기소를 결정했다. 치열한 법정공방이 1년 넘게 이어진 끝에, 2024년 4월15일 유무죄를 결정할 배심원단 12명을 선출하는 것으로 재판 절차가 공식 시작됐다. 전직 대통령의 ‘은밀한 사생활’을 둘러싼 막장 법정드라마가 6주 남짓 이어졌다. 최후변론을 거쳐 5월30일 배심원단이 만장일치 평결을 내렸다. 검찰이 기소한 34건의 혐의 모두 유죄가 인정됐다. 최대 징역 4년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다. 미국에서 전직 대통령의 형사 사건에서 유죄를 받은 첫 사례였다.

배심원단의 유죄 결정이 내려지면, 재판장이 형량을 선고한다. 애초 재판부는 최종 선고기일을 7월11일로 정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공화당 대선 후보 자리를 굳힌 상태였다. 그를 대선 후보로 확정할 공화당 전당대회(7월15~18일)는 선고기일 나흘 뒤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개막할 예정이었다. 머천 판사는 7월2일, 애초 예정된 선고기일을 9월18일로 연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난히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미룬 기일을 12일 앞둔 9월6일 머천 판사는 4쪽 분량의 결정문을 내놓고, 선고기일을 대선 이후인 11월26일로 재차 연기했다. 대선을 불과 60일 앞둔 시점이었다. 머천 판사는 결정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선거 영향 고려해 선고 연기

“법원은 공정하고, 불편부당하며, 비정치적인 기관이다. 선고기일을 연기하는 법원의 결정 또는 선고를 하는 법원의 판결이 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에게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해석을 낳게 해선 안 된다. 형사사건에서 선고기일 연기는 피고인의 개인적 사정 등의 이유에 따라 통상적으로 허용되며, 여러 차례 허용되기도 한다. 이 사건 피고인이 여타 피고인과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 본 재판부는 결코 가볍게 결정을 내리지 않았으며, 사법정의 실현을 위한 최선의 결정이라고 판단한다. 아무리 근거가 박약하더라도 법원의 선고 절차가 피고인이 후보로 출마한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치거나, 영향을 끼칠 목적이 있다는 모양새를 피하기 위해 선고기일 연기를 결정한다.”

2024년 11월5일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7730만여 표(49.8%)를 얻으며, 31개 주에서 승리해 재선에 성공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선고기일과 관련한 논란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 변호인단 쪽은 현직 대통령은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않는 헌법상 ‘면책특권’을 내세워 공소기각을 주장했다. 검찰 쪽은 공소기각에는 반대하지만,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선고를 연기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머천 판사는 11월22일 선고기일을 다시 ‘무기한 연기’했다.

법정공방은 이어졌다. 검찰 쪽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징역형 등 신체형이 아닌 벌금형 등 비신체형을 선고하거나, 대통령 임기를 마친 이후로 선고를 연기해야 한다고 맞섰다. 변호인 쪽은 “대통령 당선자의 정권인수 작업을 방해해 연방정부의 기능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며, 공소기각 주장을 이어갔다. 대통령의 ‘공식적 활동’에 대해 포괄적 면책특권을 부여한 연방대법원의 판결(2024년 7월1일)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에 대해 머천 판사는 12월16일 “검찰이 제시한 증거는 (트럼프 대통령의) 혐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비공식적 행위’임을 입증한다”고 판시했다. 변호인 쪽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머천 판사는 2025년 1월3일 선고기일을 1월10일로 지정하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또는 화상으로 출석하라고 통보했다. 뉴욕주 항소법원은 1월7일 트럼프 대통령 변호인단의 선고 연기 요청을 기각했다. 연방대법원도 1월9일 “대통령직과 연방정부 운영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변호인 쪽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월10일 머천 판사는 18쪽 분량의 판결문을 통해 ‘무조건적 석방’을 선고했다. 사건은 종결되고, 유죄 판결은 유지되지만, 징역형이나 벌금·보호관찰 등 법적 처벌은 추가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머천 판사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썼다.

유죄 판결은 유지… 법적 처벌만 안 해

“대통령직을 보호한다는 것은 그 직책을 보호하는 것이지, 그 직책을 맡은 사람을 보호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대통령직을 보호하는 것은 감형요인이 되지 않으며, 범죄의 심각성을 낮추거나 범죄 행위를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다만 대통령직을 보호하는 것은 법이 정한 의무이며, 법원도 이를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 따라서 본 재판부는 이 사건의 유일한 합법적 판결은 ‘무조건적 석방’이라고 결정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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